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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뉴스> 위유미 원장 칼럼, 청둥오리의 모성애
23-07-14 23:25관리자37회
하천가를 산책할 때면 청둥오리 가족을 만난다. 오리가족은 산책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어미오리는 물속에서 새끼들과 옹기종기 모여 있기도 하고, 어느 때는 풀숲에 들어가서 놀고 있는 새끼들을 지키느라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서있기도 한다.

사람들이 먹이를 던져주면 새끼들은 서로 먹겠다고 순식간에 달려든다. 그러나 어미는 먹이를 위해 달려들지 않는다. 그저 내 새끼들이나 많이 먹거라 하는 자상한 어미의 모습이다. 그뿐인가. 새끼들 중 한 마리라도 안보일 때는 목을 길게 빼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새끼가 있는 곳으로 물살을 가르고 재빠르게 달려간다.

이렇게 새끼들을 지키면서 먹이를 찾아주고, 보호해 주고, 부모역할을 수행하는 청둥오리의 모성애(母性愛)에 감동을 한다. 화려한 수컷은 알을 낳으면 암컷의 곁을 떠나 혼자 자유로이 다닌다고 하더니 새끼들 옆에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갈색 깃털에 점박이가 있는 수수한 암컷만이 알을 낳은 후 28~29일 동안 품었다가, 부화한 새끼가 독립할 수 있는 50~60일 동안 곁을 떠나지 않고 어미 역할을 다한다고 한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가를 수 없을 만큼 애틋하고 든든한 모성애다.

모성애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본능적인 사랑이다. 어머니에게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는 본성적인 욕구가 존재하기에 인간의 생존과 번영이 이루어지고 인류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끔씩 동물의 세계를 시청하다보면 동물들의 모성애가 눈물겨울 때가 많다. 유난히 모성애가 강한 코알라, 오랑우탄 등은 생명이 위협당하는 극한 상황에도 자신의 안전을 희생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제 새끼들을 지켜낸다.

동물의 모성애는 그저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인간만이 사회적, 심리적, 문화적 요소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형태의 모성애를 보인다. 엄마만이 가진 그 특별한 사랑의 힘으로 자녀 양육에 온 힘을 쏟고 헌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는 자신의 자녀를 죽인 부모들에 대한 끔찍한 뉴스를 자주 듣게 된다. 심지어 최근에는 갓 낳은 자신의 아이를 연이어 두 명씩이나 생명을 앗아간 엄마가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다. 갓 태어난 아이들이 어쩌다 그런 참담한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자식을 죽인 엄마여도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생활고에 시달렸다거나, 정서적·심리적 문제를 겪었다거나, 가정 내 복잡한 사정 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생존의 문제가 있었기에 극단의 일을 저질렀노라는 말을 어디까지 용납해야 할까.

사건의 본질이 왜곡된 모성애의 문제라고 단순한 해석을 할 수는 없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을 타인이 판단하는데는 분명히 한계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극한의 상황에서도 모성애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적 시스템이 작동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만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동일한 비극이 반복되는 것은 결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The personal is the political)이라고 했다. 모든 국민은 정치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개인의 일반적인 삶에는 사회적, 정치적 영역과 상호관련성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반드시 도움이 필요하다. 개인의 사생활이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국가와 사회는 사각지대에 숨어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내 자녀이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왜곡된 모성애가 아닌 진정한 모성애의 가치를 이해하고 인식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미국의 작가이자 교육자인 토마스 드윗 달마지는 “모성애의 위엄, 숭고함, 상냥함, 영원함과 거룩한 의미를 무엇으로 표현하랴”라고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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